고구려시대 한국 역사 국호 동명성왕 주몽
고구려
고구려는 한국의 고대 왕조 중 하나입니다. 국성은 횡성입니다. 원래 국호는 고구려였으나 당시 금석문과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장수왕 대에 고려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에도 궁예가 세운 고려(901년)와 왕건이 세운 고려(918년)가 계승하였고, '고려' 국호는 천 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의 영어 국호인 코리아도 고려에서 유래한 고구려는 현재 평안도, 랴오닝성, 지린성을 주 무대로 한반도 중부와 남부, 헤이룽장성 및 연해주, 몽골 동부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내부적으로는 말갈, 거란, 실 위 등을 휘하에 두고 모용수의 후 연과 요동군을 둘러싸고 대립하였고 이후 요동군 정벌과 북연을 속방으로 삼아 역량을 과시하였습니다. 제도적으로도 도교, 불교, 태학, 율령 등의 제도를 도입하여 체계적인 제도를 갖추고 국가를 운영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군주를 천제지라 칭하며 스스로를 천제의 후손으로 여기고 영락, 영강, 연수, 건흥, 엔카 등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고구려시대는 한민족 전통문화의 뿌리로 각저총 씨름 길을 기반으로 전통 스포츠씨름의 기원이 되었던 시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난방방식의 온돌, 현악기 거문고의 기원으로도 여겨지고 있으며, 한민족 전통 설화 토생원전, 바카온달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등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한반도 남부와 풍습과 언어가 같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고구려 국호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이름 붙였는데, 5세기 장수왕 대에 국호를 고려로 개칭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이름 고려는 보덕국과 대조영 발해에서 국호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워 계승하고, 918년 정권을 장악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고려가 다시 맥을 이은 것입니다.
'고려'라는 이름
이름 '고려'는 12세기 왕 씨가 이 왕조를 계승하여 세운 고려를 통해 아라비아와 유럽으로 재확산되어 현대 고구려 고분군을 점유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Democratic People's of Korea, 약칭은 DPRK이고 충주 고구려비가 위치한 대한민국의 공식 영어 명칭은 Republic of Korea. 약칭은 ROK이다. 국호 외에도 고구려는 고구려대학, 고구려 천문과학관 등 많은 영역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의 왕조와의 시대 구분에 관해서는 왕 씨의 고려대에서는 이 왕조를 '앞에 있던 고려'라는 뜻의 옛 고려라고 불렀고, 신라국 석남산 고사 비명 후기를 통해 자신들을 '뒤를 이은 고려'라는 뜻의 후 고려라 칭하여 구별하였습니다.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이 왕조를 4세기까지의 국호인 고구려로 표기하여 왕씨가 세운 고려와 구별하였습니다.
고구려 역사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의 원래 이름은 해주몽(解朱蒙)으로 출생은 기원전 58년이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예맥족의 국가 부여의 일부였던 북부여의 왕 해모수의 아들입니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왕이면서 동시에 부여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천제의 아들이라 불렸습니다. 외조부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이며 그의 세 딸 하유화•하훤화•하위화중 하유화가 그의 어머니입니다. 이름인 주몽(朱蒙)은 부여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신궁(神弓)이라는 뜻입니다. 어릴 때부터 활로 파리를 쏘아 맞힐 정도로 재능을 타고 났다 전해집니다 당시 해부루(解夫婁)의 뒤를 이어 부여의 2대 왕이었던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습니다. 일곱 아들중 태자였던 해대소(解帶素, 대소왕)를 주축으로 6명의 형제는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주몽은 협보, 오이, 만리와 함께 부여를 나와 남하하였다.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리대수에 이르렀습니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옴리대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천제의 손자요, 강신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살려 달라"고 하자 이에 감응한 자라와 물고기가 수면에 떠 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널 수 없어 더 이상 좇아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어별성교라 칭합니다.
해주몽은 배의 다른 친구 3명과 함께 남하하여 졸본에 정착하였습니다. 그곳 세력가 연타팔의 둘째 딸 서선호와 혼인하였습니다. 그 후 비류국의 군장 송양을 만났습니다. 해주몽은 선양을 포섭하기 위해 그와 활싸움을 신청했고, 선양이 옥지를 백보 밖 표적으로 삼자 기왓장이 부서지듯 백발백중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기원전 36년 송양은 주몽에 투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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